Category Archives: 신앙생활 길라잡이 / Christian Life

성경을 알자 (20)

노아홍수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심판
“석탄과 석유, 화석의 존재가 역사적 사실 증명해”

또한 전 지구적인 대 격변은 화석 연료인 석탄과 석유의 존재를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석탄과 석유의 존재는 과거 어느 때엔가 살았던 엄청난 양의 식물과 동물이 한꺼번에 매몰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죽은 식물로는 도저히 그러한 석탄층이 생겨날 수 없고, 지금 지구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동물이 한꺼번에 죽어서 매몰된다 해도 석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식물들이나 동물들은 그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흙에 묻히면 그냥 흙에 스며서 흙이 되고 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천연가스나 원유는 육지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해수면에서 150m~180m 밑을 내려가야 나옵니다. 이것은 그 밑에 엄청난 양의 동물이 묻혔다는 말인데, 바다 고래가 스스로 ‘우리가 인류를 위해서 죽어 석유가 되자’며 한꺼번에 죽어 석유가 되었겠습니까? 바다 속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노아홍수라는 천지 대 격변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지구과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석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나무가 죽으면 거름이 되고 말지 석탄이 됩니까? 천지가 대 격변이 나서 뜨거운 열이 가해져 나무들이 타기는 탔는데 가스가 빠져나가지 못한 채 압력에 눌려 석탄이 된 것입니다.

천지 대 격변은 단지 물만 많았다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바다가 산으로 솟아오르고 산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그 이상의 대 격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석은 어떻습니까? 물속에서 물고기가 얼마나 빠릅니까? 돌멩이를 던져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릅니다. 그런 물고기가 자연사해서는 화석이 되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으면서 나는 화석이 되자 한다고 화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 다른 고기가 와서 다 먹어 버릴 것입니다.

얼마나 천지 대격변이 순식간에 일어났던지 물고기가 피할 수 없을 만큼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화석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아홍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구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환경이 지금과 다른 시대가 실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시대를 학자들은 빙하기라 부릅니다. 그러나 왜 빙하기가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빙하기가 생긴 원인을 60여 가지로 주장하지만 아직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고 정설은 없습니다.

성경을 알자 (19)

노아홍수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심판
“석탄과 석유, 화석의 존재가 역사적 사실 증명해”

창세기의 세 번째 큰 주제는 홍수 심판입니다. 노아 홍수를 자연재해로 볼 것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여러 가지 과학적 자료에 의하여 홍수가 있었던 것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성경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노아 홍수를 자연재해로 이해하겠지만 성경은 홍수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밝히 드러냅니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제 2월에 방주에 들어갔고, 그날 이후 40주야에 걸쳐 계속 비가 내림으로 온 세상이 다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창7:1-24, 8:1-17).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물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12) 땅에서는 큰 깊음의 샘물이 터지고 하늘에서는 하늘의 창들이 열려 윗물이 땅 아래로 쏟아져 내려 천지가 개벽한 것입니다. 지진이 나고 화산은 폭발하고 대륙은 물속으로 잠기고 산은 바다로 내려앉고, 바닷물은 산 위를 덮었습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인정하듯이 40일 동안 내린 비만으로는 지구의 모든 산을 덮기에 부족합니다. 지구 전체에 홍수가 나려면 해저가 솟아오르거나 대륙이 가라앉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따라서
홍수의 주요 원인으로 바닷물의 육지 침범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성경의 간단한 설명에 비해 현대과학은 노아 홍수 때 바닷물이 육지로 침범했다는 많은 증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정월1일,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창8:13) 7주 후인 2월 27일(창8:14) 그들은 마른 땅에 내려서게 됩니다. 그곳은 아마도 지금의 터키 동부의 아라랏산 아래에 있는 반(Van) 호수
근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 호수(해발 1,700m 바다 청어가 서식함)는 내수면 호수이지만 염분을 함유한 염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호수가 지중해나 흑해, 그리고 인도양의 물과 연결되어 있었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 호수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자동차로 한 나절을 달려도 호수 한 변의 끝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호수 둘레를 일주하려면 자동차로 이틀이 걸립니다. 이러한 호수가 터키에 여러 군데 있고, 지구상에도 반 호수와 같은 염호(鹽湖)가 여럿 있습니다. 이란의 우르미아 호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고비 사막의 내지해(內地海))등 입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가 어느 한 지역의 홍수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대 홍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자 (18)

선악과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매일 말씀에 순종해야”
선악과의 명령으로 인하여 설령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온다 할지라도 아담의 인격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아담이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원하지 않는 사랑이나 찬양을 하나님은 견디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사람도 로봇에게‘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입력하여 입력한 대로 반응하는 그런 사랑은 원치 않습니다.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녀의 의지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아담)에게 인격을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결국 아담에게 부여하신 이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내내 큰 어려움을 겪으십니다.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만큼 후회와 절망으로 전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거듭거듭 반역하는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수천 년을 분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전 세계 열방가운데서 또 하나님은 외면당하시고 인간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한 아픔을 감수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 없는 종교를 원합니다. “내가 원할 때 내 요구는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 요구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름달 아래 정한수 떠놓고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큰 나무나 잘 생긴 바위만 보아도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사람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그 저의는 간단합니다. 우상은 하라 마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쉬울 때 가서 복을 구하면 됩니다. 선악과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선악과 없는 종교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선악과 없는 종교가 세상에만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선악과 없는 신앙생활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복은 받으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저속한 종교생활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을 열등한 신으로 추락시킵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매일 선악과(말씀) 명령을 순종하며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자 (17)

선악과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매일 말씀에 순종해야”
그런데 이 축복의 명령에 더하여 영적 존재인 아담에게 덧붙이실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 넌 내가 만들었어. 네게 많은 소유와 능력을 주어 네가 대단한 존재가 되었지만 넌 피조물이고 난 창조주야, 이것 잊지마, 넌 이 명령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고 행복한 것이니 잊으면 안 돼” 하신 것입니다. 이게 선악과 명령입니다.
선악과에 무슨 독이 있어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무는 동산 중앙에 있어 동산 어디에서든지 잘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어디서나 잘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지정하며 약속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은 지식이나 능력이 많아야 순종할 수 있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바라보며 기억하며 순종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피조물이 피조물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날마다 선악과를 바라보지만, 그것을 먹지 않음으로 생명을 보존하며 에덴동산의 온갖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선악과(말씀)를 매개로하여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며 이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의 온갖 보화를 누리는 길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아는 아담에게 선악과 금지 제안은 문제도 되지 않는 너무나 황송한 제안이었습니다.
오히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편에서 이 제안은 부당하고 많은 위험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괜한 약속을 했다 혹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도전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권위는 추락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고도 그런 제안을 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성이 완전하고 의지가 완전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감정이 완전하신 것에는 건성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단히 감정적(?)이신 분이십니다. 택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계속되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내어주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픈 애가는 이 세상 그 어떤 애가보다 처절하고도 참담합니다. 또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독생자라도 내어주시고, 자신의 죽음보다 더 어려운 십자가의 죽음에 아들을 내어주시도록 결코 인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시는 사랑의 절정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알자 (16)

선악과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매일 말씀에 순종해야” 이제 창세기의 두 번째 주제, 타락에 대하여 살펴볼 시간입니다. 선악과로 말미암은 인간타락의 문제에 직면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하셨는가? 죄에 빠지게 해 놓고 또 구원하신다 그러시고, 아예 만들지 않았으면 우리가 죄도 짓지 않고 좋았을텐데” 하는 것들입니다.
선악과 명령이 워낙 유명세(?)를 타 하나님의 명령하면 주저없이 선악과 명령이 생각나지만사실은 선악과 명령보다 더 먼저 주시고 더 근본적인 하나님이 명령이 있습니다.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심정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며 선악과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환경을 먼저설정하셨습니다. 식량, 물, 태양, 산소 등 과학적인 환경과 꽃, 강물, 해지는 들녘 등 예술적인 디자인과 컬러의 조화를 이룬 정서적인 환경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사람을만드시고 그 만드신 사람이 지구에 충만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 충만한 사람 가운데서 아담 하나를 택하셨습니다.(창2:7) 이 아담은 수 십억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뽑힌 사람으로 남자 중의 남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을 위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거기 두셨습니다. 이 에덴은 벌거벗어도 춥지 않고 온갖 짐승과 함께 뒹굴며 놀아도 해를 입지 않는 지상 낙원이었습니다. 아담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할 능력이 있었고 모든 만물은 복종했습니다.(창2:19)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직접 대화하시고 그를 기뻐하며 사랑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아 기르며 그를 위해 힘을 다해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도 그를 기뻐하며 사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지금 말하려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명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자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최대한의 솜씨로 마련해둔 환경에서 아담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만물은 너를 위한 것이야 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세상을 정복하고 개척해봐 내가 너를 축복할 거야” 이것이 바로 근본명령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 아닙니까?

성경을 알자 (15)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화석을 통한 진화의 증거물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유전학자 골드슈미트는 이른바 ‘유익한(바람직한) 괴물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돌연변이를 통하여서는 대개 유익하지 못한 기형이나 괴물들이 태어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 아주 오랜 세월이 자꾸 흐르다가 보면 혹 유익하고 바람직한 괴물과 기형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과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진화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억지이론까지 짜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억지이론을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발표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 이론은 진화론자 사이에서도 외면당했습니다.

지금은 구태여 유인원의 진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사전이나 과학지를 찾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매일 드나드는 인터넷 검색창에 ‘쟈바인’혹은 ‘네안데르탈인’ 등 어떤 유인원이라도 치고 들어가면 친절하고 상세하게 그 유인원이 가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름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진화된 원숭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잘못된 정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자신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는 동시에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으로 만든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알자 (14)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하이델베르크인: 1907년 독일의 마우어지방에서 발견된 턱뼈를 진화론자들은 25만 년 전의 유인원이라고 했습니다. 후에 유명한 인류학자요 또한 진화론자인 허들리카 박사가 정밀분석한 결과 그 뼈들은 “오늘날 하이델베르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꼭 같은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제는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자들의 거짓을 폭로하는 시대로 접어 든것입니다.
베이징인: 1922년부터 1938년까지 38개의 뼈들이 북경의 서남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북경의 유니온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던 블랙 박사는 이를 중국의 고대 유인원들의 뼈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발달된 과학으로 정밀분석이 가능해지자 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베이징원인이 분실되었다며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네브리스카인: 1922년 헤럴드 쿡은 미국 네브라스카 서부의 강변에서 모양이 이상한 치아 한 개를 주었습니다. 고대 생물학자 오스본 교수는 이것을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이 학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정밀 검사해 본 결과
이는 산돼지 이빨로 판명이 났습니다.
필트다운인: 1922년 영국의 찰스 도우슨은 영국의 필트다운 지방에서 턱뼈와 두개골 일부를 주워서 50만년 된 유인원의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운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최근에 이것은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탄의 턱뼈를 조작하여 화공 약품에 담가 두 가지가 동질성을 보이도록 조작한 것으로 밝혀져서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찰스 도우슨은 찰스 다윈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유전학자라고 칭송받으며 전 세계를 돌며 강의를 해 왔는데 그의 사후 50년, 싸이언스지 칼라판에 사기극으로 발표되어 세계인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론은 지금까지 인간과 원숭이 중간단계의 화석은 하나도 발견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럽의 3대 자존심인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자기나라 사람들이 더 오래 된 인종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앞을 다투어 조작된 뼈들을 가지고 별의 별 이름을 붙여가며 뼈다귀 콘테스트를 해 왔던 것입니다. 서로 더 오래된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기를 쓰고 우겨대니 이 같은 코미디가 또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알자 (13)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하이델베르크인: 1907년 독일의 마우어지방에서 발견된 턱뼈를 진화론자들은 25만 년 전의 유인원이라고 했습니다. 후에 유명한 인류학자요 또한 진화론자인 허들리카 박사가 정밀분석한 결과 그 뼈들은 “오늘날 하이델베르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꼭 같은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제는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자들의 거짓을 폭로하는 시대로 접어 든 것입니다.
베이징인: 1922년부터 1938년까지 38개의 뼈들이 북경의 서남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북경의 유니온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던 블랙 박사는 이를 중국의 고대 유인원들의 뼈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발달된 과학으로 정밀분석이 가능해지자 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베이징원인이 분실되었다며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네브리스카인: 1922년 헤럴드 쿡은 미국 네브라스카 서부의 강변에서 모양이 이상한 치아 한 개를 주었습니다. 고대 생물학자 오스본 교수는 이것을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이 학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정밀 검사해 본 결과 이는 산돼지 이빨로 판명이 났습니다.
필트다운인: 1922년 영국의 찰스 도우슨은 영국의 필트다운 지방에서 턱뼈와 두개골 일부를 주워서 50만년 된 유인원의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운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최근에 이것은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탄의 턱뼈를 조작하여 화공 약품에 담가 두 가지가 동질성을 보이도록 조작한 것으로 밝혀져서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찰스 도우슨은 찰스 다윈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유전학자라고 칭송받으며 전세계를 돌며 강의를 해 왔는데 그의 사후 50년, 싸이언스지 칼라판에 사기극으로 발표되어 세계인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론은 지금까지 인간과 원숭이 중간단계의 화석은 하나도 발견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럽의 3대 자존심인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자기나라 사람들이 더 오래 된
인종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앞을 다투어 조작된 뼈들을 가지고 별의 별 이름을 붙여가며 뼈다귀 콘테스트를 해 왔던 것입니다. 서로 더 오래된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기를 쓰고 우겨대니 이 같은 코미디가 또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알자 (12)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유인원의 것이라고 발표했던 유골들은 하나같이 조작되고 날조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진화가 아니라 발전이었습니다. 발전된 것은 인류 문화유산의 축적이지 인간 자체의 진화는 아닌 것입니다.
크로마뇽인이나 쟈바인, 네안데르탈인 등 ‘인간은 진화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봅시다.
크로마뇽인: 1868년 프랑스의 크로마뇽 바위 밑에서 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뼈의 주인들은 동굴 벽에 정교한 벽화를 그릴 정도로 예술성이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리말디 동굴에서 또 다른
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그 생김새가 크로마뇽 바위 밑에서 발견된 뼈들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생 인류의 뼈들임에 틀림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의 두개골 윤곽이 얼마나 다양한지 생각해 본다면 이런 학자들의 단순하고 무책임한 학설이 얼마나 인간 세계를 혼란스럽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화론은 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며 양심의 문제입니다.
쟈바인: 1892년 네덜란드의 듀보아는 두개골, 치아, 대퇴골을 발견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개골과 치아는 원숭이 같고 대퇴골은 사람 같았습니다. 듀보아는 이를 50만년 된 직립 원인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머리뼈와 다리뼈는 같은 곳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각각 20m씩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의 머리뼈가 발견된 곳과 가까이에 사람의 다리뼈도 있었으나, 그것을 취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원숭이 뼈를 취하는 비윤리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지방을 답사하여 정밀조사를 한 독일의 탐험대는 이 지방의 지층은 약 500년 전 지진에 의해 형성된 지층이라고 폭로했습니다. 난처해진 듀보아는 1936년 전에 발표한 쟈바인은 원숭이의 유골이었다고 실토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 1856년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뼈들을 진화론자들은 20만년 전의 진보된 유인원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최근에 이 뼈들을 정밀 조사한 결과 “이 뼈의 주인은 비타민 D 결핍으로 인한 구루병 환자였다”고 발표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알자 (11)

우주 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과학적 사실이 되려면 관찰되고 목격하여 가설을 수립하고 실험하여 증명되어야 하며 그 증명이 언제 어디서 누가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진화는 우선 목격된 것이 없습니다. 가설은 수립했지만 실험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고 결과가 없으니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100년이나 주었는데도 목격도 안 됐고, 실험도 안 됐고, 증명도 안 됐기 때문에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모르고 말한다면 무식해서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으나 알면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온전한 질서를 가진 형태로 창조했습니다. 그 귀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인간의 타락과 자연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점점 파괴 일변도로 진행되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창조가 더 과학적이며 더 합리적입니다.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공할 확률이 실패할 확률보다 훨씬 높아도 혹 있을지 모르는 실패의 낮은 확률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선뜻 털고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지간히 진실을 말해도 이미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잘못된 지식을 부인하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시기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합니다. 그러므로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에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도무지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질퍽한 뻘처럼 한번 빠지면 도저히 헤쳐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북 치고 장구 치며 그 신념을 도와주고 있으니 더더구나 어렵습니다. 정말 우울하고 속상한 일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진화론을 살펴보며 그 수렁에서 단번에 쑥 빠져나옵시다.

성경을 알자 (10)

우주 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속에 창조돼
야생동물들의 세계에 잡종이 생기는 수가 어쩌다 있지만 그 잡종은 거의 생식이 불가능합니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노새는 번식을 할 수 없습니다. 변이를 통한 진화의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가 혹 나타나도 다음 대에서는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전인자
교정장치(DNA Repair System)가 있기 때문에 돌연변이도 언제나 일회적이요 그 다음은 곧 바로
본래적인 형질로 환원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과 원숭이의 염색체수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46, 원숭이-54, 소-60, 고양이-38, 개-
22, 잉어-104, 닭-77, 수탉-78, 완두콩-14, 벼-24, 담배-48 입니다. 잉어가 104개이니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원숭이와 사람은 종(種)이 다르기 때문에 이 종(種)에서 종(種)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가 애초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모든 물질은 우연 속에 방치되었을 때는 점점 붕괴일변도로 변하게
된다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이 이론에 반대하는 과학자는 없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질이 점점 질서를 잡아가고 더 개량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무질서로 진행되고 마침내는 붕괴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과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입니다. 요즘 진화론자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진화는 중단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중단된 것이 아니라 원리상
물리학적으로, 화학적으로, 열역학적으로 진화가 될 수 있는 터전이 전혀 없습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도 우리에게 설득력 있던 이론입니다. 기린이 목이 길어진 것은 땅의 풀이
모자라 나무에 있는 잎을 따 먹으려고 목을 길게 늘이다보니까 목이 길어졌다는 것인데 유전법칙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은 다음 대에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자연도태설, 적자생존설, 약육강식설인데 같은 말입니다. 생존경쟁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 살아남는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자연계는 오히려 강한 것은 새끼를 잘 낳지 못하고 먹이를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자 같은 경우 네 마리 중 한 마리만 살아남습니다. 동물계에 강한 자만
남는다면 사자만 남아야 하고 그 가운데 가장 강한 두 마리가 서로 겨루다 이긴 자의 먹이가 되고
결국 남은 한 마리도 먹을 것이 없어 먹어 굶어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물계는 오히려 약하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수가 더 많고 더 잘 번식합니다. 사자보다 사슴이나 기린이 많고 고양이보다
쥐가 더 많습니다.

성경을 알자 (9)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현대과학은 열역학 제1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과학용어라 어렵게
들리지 실상 별것 아닙니다. 과학계에서 발견한 이론에 그냥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이
법칙은 발견된 이후 미생물 세계에서나 거대 생물세계에서나 한 번도 깨어지지 않은
과학법칙입니다.(사람들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하도 중요하게 생각하니 과학을 강조합니다만 실상
하나님은 과학이 생겨나기 아주아주 오래 전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열역학 제1법칙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無)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명체도 발생되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과거에는 생명체가 우연히 발생한다고 쉽게 말했으나 미생물학을 발전시킨 과학자
‘루이스파스텔’의 실험, 즉 백조 목프라스크 안에 고기국물을 넣고 미생물이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해 주고 미생물이 발생되길 기다렸으나 끝내 미생물은 발생되지 않았습니다.
현미경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에는 박테리아나 집신벌레, 아메바 등은 우연히 물이 있고 영양분이
있으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전공학이나 분자생물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박테리아 하나도
절대 단순하지 않고, 박테리아 한 마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은 그 종류만 2800종이며, 그
단백질이 순서에 맞게 배열되어야만 온전한 박테리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인간들이 자연 속에서 단세포 생물이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온갖
실험을 다해 보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제트엔진과 우주왕복선에
100만개가 넘는 부속품을 만들어 하늘과 우주를 날게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는 설계도, 조립도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읽기 편한 10Point 활자의 마침표가 1mm가 안 되는 크기인데 우리 세포의 크기는 그 마침표의
정도입니다. 그렇게 작은 세포 안에 핵이 있고 그 핵 안에 염색사가 이중으로 꼬여 있는데 그것을
분리하면 174cm 길이의 마이크로필름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 마이크로필름 속에 입력되어
있는 인체의 설계도가 유전정보입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 난자는 정자 속에 있는 이 설계도를
읽어가며 설계도대로 심장을 만들고 혈관을 만들고 피를 만듭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정교한 어떤 조작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인체의 신비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생명체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8)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창조에 대하여
어릴 때는 뭘 모르고 그냥 저냥 교회 다녔지만 공부를 해보니 진화론이 잘못된 것이고 창조가
진실이구나! 이렇게 알고 더욱 굳건히 말씀에 서야 정상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교회학교에 와서 질문하는 학생도 잘 없지만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교사가 많지
않는 것도 교회학교의 큰 문제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이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취급했기 때문에 많은
기도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양육해 놓은 학생들을 맥없이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진화론은 정설이 아닌 가설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이라는 거대한
공교육에서 이를 받아들여 기정사실로 가르치면서 온 세상이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은 100% 허구입니다. 예전에는 진화론의 주장을 100% 허구로 밝혀낼
정도로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지만 분자 생물학이 발달된 21세기에 와서는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사건에서도 보았듯이 학문의 세계란 많은 부분 허구의 세계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경악할 일이지만 학자들은 조그마한 가능성만 가지고도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고,
가능성이 희박해도 자신들의 학문적 업적을 위해 조작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며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오류가 됩니다.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성경만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모든 학문의 표준(canon)이 되며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입니다.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을 치워주는 일을 과거에는 제사장들이 했지만
이제는 먼저 믿은 우리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은 디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핑계 저 핑계로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물망에 잡힌 고기라 생각하고 안심했는데 구멍 난 그물사이로
물고기가 죄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의 기막힌 어부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고기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부의 타는 심정보다 더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는데, 뚫어진 그물망을 기울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속수무책 아닙니까?
걸려 넘어지는 돌 가운데 하나가 진화냐, 창조냐를 해결해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잘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되도록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자세하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면 믿는 우리조차 아예 읽지
않을 것이기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알자 (7)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속독보다는 생각하며 천천히 정독해야”
이제 본론입니다. 창세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11장까지로 인류의 일반 역사입니다. 창조와 타락과 홍수심판 그리고 언어의
혼잡으로 민족이 흩어지는 4가지 주요 주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주제가 선명하게
정리되어 손에 잡히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처음은 어렵지만 해보면 보람이 있습니다.
2부는 12장부터 50장까지이며 히브리 족장사입니다. 아브라함이야기, 이삭이야기, 야곱이야기,
요셉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옆에는 롯이, 이삭 옆에는 이스마엘이, 야곱 옆에는 에서가, 요셉
옆에서는 유다를 같이 살펴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네 가지 사건과 네 족장의 이야기입니다. 불과 80페이지밖에 안되지만 이 작은 책은 위대한 진리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창세기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 미래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구미 각국의 나라들이 바로 이 점을 등한히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나라에서
무신론이 나오고 유물론과 진화론이 나왔으며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서방의 신학자들이 창세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지 않고 하나의 신화(神話)나 설화(說話)로 혹은
가설(假說)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이른바 과학이라는 초등학문에 너무 쉽게 학문의
여왕자리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창세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창세기 1장 1절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우리가 증거 해야
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하나님이시며,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며, 심판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창조에 대하여
창조란 말은 창조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우주를 만들고 만물과 우리를 만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두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사단은 하나님이 계심을 방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수많은 신화, 전설, 잡다한
종교, 학설, 신념, 이데올로기 등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창조에서 걸려 넘어지는 돌(도피성 앞에 놓인 돌을 치워주는 역할이 제사장의 중요한 일이라
했습니다)은 창조를 전적으로 대적하는 진화론입니다. 교회학교 학생들이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지나며 점점 그 수가 줄어들다 대학부쯤 되면 믿는 집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학교에서는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했지만 학교에서는 천지만물을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러니 어릴 때는 뭘 몰라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믿었지,
알고 보니 그게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진화론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덩달아 다른 부분의
말씀도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을 알자 (6)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속독보다는 생각하며 천천히 정독해야”
모세오경 가운데 창세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것은 바로 창세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없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별반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구약성경 중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레위기가 가장 중요한 책이라 했다구요? 아닙니다. 레위기는
가장 중요한 책이라기보다는 가장 중심이 되는 책입니다. 이 글의 목적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잘
보자는데 있기에 앞으로 자주 되묻기도 하고 되풀이하기도 하며 성경과 친숙해 질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들은 진공상태로 붕~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밥 먹고 숨 쉬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실수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다윗과 바울같은 사람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고난도 달게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기에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사실은 미신적이며 맹신적입니다.
하늘에서는 윗물이 터져 땅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땅에서는 화산의 폭발과 지진으로 산과
바다가 뒤죽박죽 천지개벽이 되는 대홍수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고, 홍해를 건넌 수백 만의 사람과 그
보다 많은 가축이 물 없는 메마른 광야를 끝없이 헤매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울고 웃고
살아보아야 성경이 살아 움직이게 되고 성경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을 내려놓게 됩니다. 앞으로
성경을 그만 보겠다면 모르지만 계속 읽을 사람이라면 흐릿한 안개 지역을 지나가듯 대충 바삐
지나가며 장수나 채우는 성경읽기는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권면합니다. 무작정 눈으로 성경만 읽어나가면 아무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이 책을 썼는지 성경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꼭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읽는 사람보다 휠씬 속도가 늦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성경이 열리며 성경 어디를
보아도 왜 무슨 의도로 이 책을 기록되었는지 마구 흥미가 생기게 됩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성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준비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를 알려면 저자를, 언제를 알려면 역사를, 어디서를 알려면 지리를, 왜를 알려면 그
시대의 관습과 문화를 조금은 알아야 됩니다.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왜 기록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앞뒤 잘라내고 요절이라 생각되는 말씀만 붙잡고 무조건 현재 우리 삶의 적용에만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 과잉적용, 확대적용, 잘못된 적용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일단 기록된 그때
그대로의 상황을 잘 이해한 후에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5)

구약성경의 유기적인 관계
예언서가 나오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를 책망하기
위하여 예언자가 파송되고 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상기하게
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권면하게 됩니다. 순종하면 복을 내려주실 것이나 만약 여전히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와 징벌이 임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아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7권입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등장한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악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켜 행한다면 복을 받고 형통하며 평안히 잘
살기 때문에 선지자가 나와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지자란 칭찬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책망하려고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선지자가 등장한
시대는 더 악한 시대였으며, 많은 선지자가 목소리를 높였던 시대도 더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큰 선지자들이 나타났던 시대가 매우
악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합니다.
희대의 악녀 이세벨과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큰 종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했던 것이 그러한
까닭입니다.
도피성은 부지중 범죄 한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피해 도망하여 피하는 장소입니다. 그 도피성에는
제사장이 있어 도피해온 사람들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는
도피성으로 들어오는 길가에 놓여있는 돌을 치우는 작업입니다. 부지중 범죄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달려오다 돌부리에 넘어져 저를 쫓아오던 사람들에게 덜미를 잡힐 것을 염려해서 입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 돌을 치우는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 입니다.
성경의 과잉해석, 확대해석, 모호한 해석 등의 돌에 걸려 넘어지려는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살펴 그
돌을 치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4)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율법
민수기는 레위기를 실천하며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훈련일지이며, 신명기는
레위기를 본문으로 모세가 설교한 것으로 민수기에 대한 평가와 율법의 재해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통해서는 레위기를 주신 분이 도대체 누구냐고 모세 이후의 후손들이 질문할 때,
그분이 바로의 종 된 우리 민족을 그 크신 능력과 편 팔로 홍해를 갈라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분이시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신 바로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오경은 레위기를 중심으로 봐야 잘 보이고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유기적인 관계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도 역시 레위기를 의식하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가 없다면 역사서가 바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예언서 역시 레위기를 모르면 예언서에서
그토록 진노하는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이해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레위기를 떠나서는 시가서에서
울려 퍼지는 그 아름다운 사랑과 축복에 대한 시와 찬미와 감사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역사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1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서는 단순한 일반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 즉 레위기에 기록한 하나님과의 계약을 얼마나 준행하면서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번영을 구가하였고 불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국난을 겪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고, 레위기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복도 저주도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가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5권으로 지혜문서라고도 합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지혜를 얻고 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시가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서 5권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시가서를 5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경을 알자 (3)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막 12: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 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단지 문자나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말씀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율법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저주와 징벌 임해”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큰 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이란 옛적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하셨던 말씀이고,
신약이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계 모든 민족과 새롭게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옛 언약을 크게 확대하면 구약성경 39권을 말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모세오경 가운데 있는
레위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중심입니다.
레위기는 오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와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의 수많은 우상숭배의 악한 풍습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당면한 과제로는 광야에서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질서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강력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런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례와
규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 음식 규례법, 산모의 산혈이 맑아지는 기간, 나병환자 감별과
처리법, 성병 감별과 처리법, 속죄일 규례, 성윤리문제, 사회윤리, 반드시 죽일 죄, 제사장 처신
규례와 성물 규례, 안식년과 희년, 토지 무르기 등을 세세하게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을 알자 (2)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첫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음부터 성경을 혼자 읽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실지라도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구스내시의 경우 성령께서 구스내시에게
직접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에서 일하고 있던 빌립을 급히 광야로 나가게 하여 성경을 풀어
주었다.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는 교사의 인도를 받으며 함께 읽는 것이 안전하다.
둘째, 성경을 지식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성경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본인은 물론
주의 몸 된 교회도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은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하는 책이다. 성경 지식이 많은 것을 믿음이 많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읽을 수도 있고, 또 그렇게라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전체를 알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씩 읽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전체를 단번에 읽을 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면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31:9~13). 모세는 오경을 한 자리에서 한 번에 읽고, 또 오고 오는 자손들에게 가르치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불러왔다. 학사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반짝 순종했으나 그 뒤 또 흐지부지 되어
하나님은 말라기에게 하나님의 너무나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 후 400년을 침묵하신다. 400년간 다시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없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실망하고 지치신 것이다. 말씀은 바르게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되 바르게 읽어야 한다. 열심히 읽는 것도 좋고
암송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님은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실 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셨다.

성경을 알자 (1)

성경에 대한 이해와 읽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통해 하나님의 마음 읽는 것이 중요”
성경을 사랑하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 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섬겨야 온전한 섬김이 된다. 곧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의미이며 성경을 잘 모르거나 희미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거나 희미하게 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겨우 1~2년 사용하고 버리는 생활용품을 사면서도 심사숙고하는데 일평생 우리 삶을 드려
섬기는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도 별다른 안타까움조차 없이 성경도 읽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는다고 한다. 읽는다손 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도 문제요 읽어도 이해를 못하니 그야말로 큰 문제이다. 더 나아가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잘못 아는 것 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을 터이나 본다고 하니 문제라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알면 되겠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바로 아는 줄 알기 때문에 문제가 더
크다.
성경을 읽어도 욕심으로 굴절된 시각으로 읽는다면 올바른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해석도 할 수가 없다. 그 좋은 예가 유대인들이 침례 요한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함으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하는도다”(행 13:27)
외운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외우면서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한두 절을 요절로 암송한다고 그 말씀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요절만 뽑아서 이기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면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이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로마 가톨릭의 문제는 바로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매우 열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그 열심은 참된 지식을 좇는 은혜
충만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말씀이 채워지지 않은 영혼의 갈급함에서 온다. 교회 안에
세미나도 많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은 많은데 성경자체를 읽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데서 오는
갈급함이다. 오래 신앙생활 했지만 성경 66권 중 딱 부러지게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이 몇 권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