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1 Corinthians 2:1-5)

God is living. (Joshua 1:9)
He is the One who raised Jesus from the grave after He died on the cross (Acts 2:32).

He sent the Holy Spirit to testify about the gospel. (Matthew 12:28)
The gospel is spread by the mouth of Jesus Christ. (Romans 10:17)
Only when you have 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it is the truth. (John 16:13)
The kingdom of God is not a world of ideas and hence it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1 Corinthians 4:20)
The Holy Spirit does not testify about the word of man but only testifies about the word of God.
Further, He testifies about the word spoken by Jesus. (John 14:26)
Therefore, people who are to become witnesses of Jesus are commanded to receive the Holy Spirit. (John 15:26-27) This is how the kingdom of God works.
Only 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has life. (1 John 5:12)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Hebrews 4:11-12) and therefore what the Holy Spirit testifies is the truth.
Do not testify about the kingdom of God with wise words of man but do so by the Holy Spirit.
Even though you may share the word of the Holy Spirit, it has to be the truth. The Holy Spirit will testify only about the truth.
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will bring the faith of salvation.
Accordingly, let us be filled with the truth and the Holy Spirit.

성경을 알자 (11)

우주 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과학적 사실이 되려면 관찰되고 목격하여 가설을 수립하고 실험하여 증명되어야 하며 그 증명이 언제 어디서 누가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진화는 우선 목격된 것이 없습니다. 가설은 수립했지만 실험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고 결과가 없으니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100년이나 주었는데도 목격도 안 됐고, 실험도 안 됐고, 증명도 안 됐기 때문에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모르고 말한다면 무식해서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으나 알면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온전한 질서를 가진 형태로 창조했습니다. 그 귀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인간의 타락과 자연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점점 파괴 일변도로 진행되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창조가 더 과학적이며 더 합리적입니다.
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 “진화론은 사람을 비천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있어”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공할 확률이 실패할 확률보다 훨씬 높아도 혹 있을지 모르는 실패의 낮은 확률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선뜻 털고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지간히 진실을 말해도 이미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잘못된 지식을 부인하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시기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합니다. 그러므로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에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도무지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질퍽한 뻘처럼 한번 빠지면 도저히 헤쳐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북 치고 장구 치며 그 신념을 도와주고 있으니 더더구나 어렵습니다. 정말 우울하고 속상한 일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진화론을 살펴보며 그 수렁에서 단번에 쑥 빠져나옵시다.

성령이 증거하심(고전2:1-5)

하나님은
살아계시다(수1:9)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분으로(행2:32)
그가
성령을 주셔서 복음을 증거하신다(마12:28)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 전파되나(롬10:17)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진리이다(요16:13)
하나님의 나라는 관념의 세계가 아니기에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성령은
사람의 말을 증거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며 또한(요14:26)
예수의 전하시는 말씀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인될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니(요15:26-27)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이다
성령의 증거만이 생명이 있다(요일5: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시니(히4:11-12)
성령의 증거하심이 진리이다
사람의 지혜의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치 말고
성령으로 증거하여야 한다
성령의 말씀을 전한다 해도
진리이어야 하니
성령은 진리만을 증거하신다
성령의 증거는 구원의 믿음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자.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2 Corinthians 13:11-13)

God fills heaven and earth. (Jeremiah 23:24)

He created heaven for the Son to dwell and govern all things. (Matthew 28:18)

But the Son humbled Himself and became a man to serve His Father eternally. (Philippians 2:5-8)

Hence, the One and Only God who came to the world as a man (John 1:18) is Jesus Christ.

At that time, the Holy Spirit came upon Him and had fellowship with the Father. (John 14:20)

The Holy Spirit also spoke to Him and enabled Him to do His work. (John 12:49)

In the same way, the Lord Jesus sent the Holy Spirit who came from the Father to us. (John 15:26) The Holy Spirit came to facilitate fellowship between God and us.

If it is not by the Holy Spirit, we cannot have fellowship with God (1 John 2:1); the Holy Spirit wants to help us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God. (Romans 8:26)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is intended to provide the eternal life of God (Luke 23:46) even to human beings.

When God has fellowship with humanity by the Holy Spirit, He allows human beings to experience bliss. (Matthew 12:28)

Only those people who have fellowship with God in the Holy Spirit can live by the power of God. (Judah 1:20)

성령의 교통하심 (고후13:11-13)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다(렘23:24)
그가
하늘을 창조하심은
아들을 거기에 두시고
만물을 주관하게 하려 하심이다(마28:18)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이 되셔서
영원히 아버지를 섬기려 하셨다(빌2:5-8)
그리하여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은(요1:18)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때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아버지와 교통하시고(요14:20)
또한 성령으로 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일을 행하게 하셨다(요12:49)
이와 같이
주 예수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니(요15:26)
그가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교통하게 하셨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으니(요일2:1)
하나님의 뜻대로 도우려 하심이다(롬8:26)
성령이 교통하심은
하나님의 영생을(눅23:46)
사람에게도 주려 하심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심으로
사람에게 행복이 있게 하신다(마12:28)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다(유1:20).

성경을 알자 (10)

우주 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속에 창조돼
야생동물들의 세계에 잡종이 생기는 수가 어쩌다 있지만 그 잡종은 거의 생식이 불가능합니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노새는 번식을 할 수 없습니다. 변이를 통한 진화의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가 혹 나타나도 다음 대에서는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전인자
교정장치(DNA Repair System)가 있기 때문에 돌연변이도 언제나 일회적이요 그 다음은 곧 바로
본래적인 형질로 환원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과 원숭이의 염색체수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46, 원숭이-54, 소-60, 고양이-38, 개-
22, 잉어-104, 닭-77, 수탉-78, 완두콩-14, 벼-24, 담배-48 입니다. 잉어가 104개이니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원숭이와 사람은 종(種)이 다르기 때문에 이 종(種)에서 종(種)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가 애초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모든 물질은 우연 속에 방치되었을 때는 점점 붕괴일변도로 변하게
된다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이 이론에 반대하는 과학자는 없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질이 점점 질서를 잡아가고 더 개량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무질서로 진행되고 마침내는 붕괴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과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입니다. 요즘 진화론자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진화는 중단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중단된 것이 아니라 원리상
물리학적으로, 화학적으로, 열역학적으로 진화가 될 수 있는 터전이 전혀 없습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도 우리에게 설득력 있던 이론입니다. 기린이 목이 길어진 것은 땅의 풀이
모자라 나무에 있는 잎을 따 먹으려고 목을 길게 늘이다보니까 목이 길어졌다는 것인데 유전법칙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은 다음 대에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자연도태설, 적자생존설, 약육강식설인데 같은 말입니다. 생존경쟁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 살아남는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자연계는 오히려 강한 것은 새끼를 잘 낳지 못하고 먹이를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자 같은 경우 네 마리 중 한 마리만 살아남습니다. 동물계에 강한 자만
남는다면 사자만 남아야 하고 그 가운데 가장 강한 두 마리가 서로 겨루다 이긴 자의 먹이가 되고
결국 남은 한 마리도 먹을 것이 없어 먹어 굶어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물계는 오히려 약하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수가 더 많고 더 잘 번식합니다. 사자보다 사슴이나 기린이 많고 고양이보다
쥐가 더 많습니다.

성경을 알자 (9)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현대과학은 열역학 제1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과학용어라 어렵게
들리지 실상 별것 아닙니다. 과학계에서 발견한 이론에 그냥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이
법칙은 발견된 이후 미생물 세계에서나 거대 생물세계에서나 한 번도 깨어지지 않은
과학법칙입니다.(사람들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하도 중요하게 생각하니 과학을 강조합니다만 실상
하나님은 과학이 생겨나기 아주아주 오래 전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열역학 제1법칙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無)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명체도 발생되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과거에는 생명체가 우연히 발생한다고 쉽게 말했으나 미생물학을 발전시킨 과학자
‘루이스파스텔’의 실험, 즉 백조 목프라스크 안에 고기국물을 넣고 미생물이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해 주고 미생물이 발생되길 기다렸으나 끝내 미생물은 발생되지 않았습니다.
현미경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에는 박테리아나 집신벌레, 아메바 등은 우연히 물이 있고 영양분이
있으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전공학이나 분자생물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박테리아 하나도
절대 단순하지 않고, 박테리아 한 마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은 그 종류만 2800종이며, 그
단백질이 순서에 맞게 배열되어야만 온전한 박테리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인간들이 자연 속에서 단세포 생물이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온갖
실험을 다해 보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제트엔진과 우주왕복선에
100만개가 넘는 부속품을 만들어 하늘과 우주를 날게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는 설계도, 조립도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읽기 편한 10Point 활자의 마침표가 1mm가 안 되는 크기인데 우리 세포의 크기는 그 마침표의
정도입니다. 그렇게 작은 세포 안에 핵이 있고 그 핵 안에 염색사가 이중으로 꼬여 있는데 그것을
분리하면 174cm 길이의 마이크로필름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 마이크로필름 속에 입력되어
있는 인체의 설계도가 유전정보입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 난자는 정자 속에 있는 이 설계도를
읽어가며 설계도대로 심장을 만들고 혈관을 만들고 피를 만듭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정교한 어떤 조작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인체의 신비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생명체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8)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창조에 대하여
어릴 때는 뭘 모르고 그냥 저냥 교회 다녔지만 공부를 해보니 진화론이 잘못된 것이고 창조가
진실이구나! 이렇게 알고 더욱 굳건히 말씀에 서야 정상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교회학교에 와서 질문하는 학생도 잘 없지만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교사가 많지
않는 것도 교회학교의 큰 문제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이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취급했기 때문에 많은
기도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양육해 놓은 학생들을 맥없이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진화론은 정설이 아닌 가설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이라는 거대한
공교육에서 이를 받아들여 기정사실로 가르치면서 온 세상이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은 100% 허구입니다. 예전에는 진화론의 주장을 100% 허구로 밝혀낼
정도로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지만 분자 생물학이 발달된 21세기에 와서는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사건에서도 보았듯이 학문의 세계란 많은 부분 허구의 세계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경악할 일이지만 학자들은 조그마한 가능성만 가지고도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고,
가능성이 희박해도 자신들의 학문적 업적을 위해 조작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며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오류가 됩니다.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성경만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모든 학문의 표준(canon)이 되며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입니다.
우주만물과 생명체는 하나님의 온전한 질서 속에 창조돼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을 치워주는 일을 과거에는 제사장들이 했지만
이제는 먼저 믿은 우리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은 디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핑계 저 핑계로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물망에 잡힌 고기라 생각하고 안심했는데 구멍 난 그물사이로
물고기가 죄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의 기막힌 어부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고기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부의 타는 심정보다 더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는데, 뚫어진 그물망을 기울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속수무책 아닙니까?
걸려 넘어지는 돌 가운데 하나가 진화냐, 창조냐를 해결해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잘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되도록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자세하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면 믿는 우리조차 아예 읽지
않을 것이기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알자 (7)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속독보다는 생각하며 천천히 정독해야”
이제 본론입니다. 창세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11장까지로 인류의 일반 역사입니다. 창조와 타락과 홍수심판 그리고 언어의
혼잡으로 민족이 흩어지는 4가지 주요 주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주제가 선명하게
정리되어 손에 잡히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처음은 어렵지만 해보면 보람이 있습니다.
2부는 12장부터 50장까지이며 히브리 족장사입니다. 아브라함이야기, 이삭이야기, 야곱이야기,
요셉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옆에는 롯이, 이삭 옆에는 이스마엘이, 야곱 옆에는 에서가, 요셉
옆에서는 유다를 같이 살펴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네 가지 사건과 네 족장의 이야기입니다. 불과 80페이지밖에 안되지만 이 작은 책은 위대한 진리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창세기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 미래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구미 각국의 나라들이 바로 이 점을 등한히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나라에서
무신론이 나오고 유물론과 진화론이 나왔으며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서방의 신학자들이 창세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지 않고 하나의 신화(神話)나 설화(說話)로 혹은
가설(假說)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이른바 과학이라는 초등학문에 너무 쉽게 학문의
여왕자리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창세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창세기 1장 1절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우리가 증거 해야
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하나님이시며,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며, 심판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창조에 대하여
창조란 말은 창조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우주를 만들고 만물과 우리를 만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두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사단은 하나님이 계심을 방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수많은 신화, 전설, 잡다한
종교, 학설, 신념, 이데올로기 등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창조에서 걸려 넘어지는 돌(도피성 앞에 놓인 돌을 치워주는 역할이 제사장의 중요한 일이라
했습니다)은 창조를 전적으로 대적하는 진화론입니다. 교회학교 학생들이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지나며 점점 그 수가 줄어들다 대학부쯤 되면 믿는 집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학교에서는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했지만 학교에서는 천지만물을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러니 어릴 때는 뭘 몰라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믿었지,
알고 보니 그게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진화론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덩달아 다른 부분의
말씀도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을 알자 (6)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성경, 오류가 없는 참된 진리
“속독보다는 생각하며 천천히 정독해야”
모세오경 가운데 창세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것은 바로 창세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없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별반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구약성경 중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레위기가 가장 중요한 책이라 했다구요? 아닙니다. 레위기는
가장 중요한 책이라기보다는 가장 중심이 되는 책입니다. 이 글의 목적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잘
보자는데 있기에 앞으로 자주 되묻기도 하고 되풀이하기도 하며 성경과 친숙해 질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들은 진공상태로 붕~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밥 먹고 숨 쉬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실수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다윗과 바울같은 사람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고난도 달게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기에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사실은 미신적이며 맹신적입니다.
하늘에서는 윗물이 터져 땅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땅에서는 화산의 폭발과 지진으로 산과
바다가 뒤죽박죽 천지개벽이 되는 대홍수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고, 홍해를 건넌 수백 만의 사람과 그
보다 많은 가축이 물 없는 메마른 광야를 끝없이 헤매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울고 웃고
살아보아야 성경이 살아 움직이게 되고 성경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을 내려놓게 됩니다. 앞으로
성경을 그만 보겠다면 모르지만 계속 읽을 사람이라면 흐릿한 안개 지역을 지나가듯 대충 바삐
지나가며 장수나 채우는 성경읽기는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권면합니다. 무작정 눈으로 성경만 읽어나가면 아무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이 책을 썼는지 성경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꼭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읽는 사람보다 휠씬 속도가 늦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성경이 열리며 성경 어디를
보아도 왜 무슨 의도로 이 책을 기록되었는지 마구 흥미가 생기게 됩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성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준비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를 알려면 저자를, 언제를 알려면 역사를, 어디서를 알려면 지리를, 왜를 알려면 그
시대의 관습과 문화를 조금은 알아야 됩니다.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왜 기록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앞뒤 잘라내고 요절이라 생각되는 말씀만 붙잡고 무조건 현재 우리 삶의 적용에만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 과잉적용, 확대적용, 잘못된 적용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일단 기록된 그때
그대로의 상황을 잘 이해한 후에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5)

구약성경의 유기적인 관계
예언서가 나오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를 책망하기
위하여 예언자가 파송되고 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상기하게
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권면하게 됩니다. 순종하면 복을 내려주실 것이나 만약 여전히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와 징벌이 임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아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7권입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등장한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악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켜 행한다면 복을 받고 형통하며 평안히 잘
살기 때문에 선지자가 나와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지자란 칭찬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책망하려고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선지자가 등장한
시대는 더 악한 시대였으며, 많은 선지자가 목소리를 높였던 시대도 더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큰 선지자들이 나타났던 시대가 매우
악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합니다.
희대의 악녀 이세벨과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큰 종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했던 것이 그러한
까닭입니다.
도피성은 부지중 범죄 한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피해 도망하여 피하는 장소입니다. 그 도피성에는
제사장이 있어 도피해온 사람들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는
도피성으로 들어오는 길가에 놓여있는 돌을 치우는 작업입니다. 부지중 범죄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달려오다 돌부리에 넘어져 저를 쫓아오던 사람들에게 덜미를 잡힐 것을 염려해서 입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 돌을 치우는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 입니다.
성경의 과잉해석, 확대해석, 모호한 해석 등의 돌에 걸려 넘어지려는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살펴 그
돌을 치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을 알자 (4)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율법
민수기는 레위기를 실천하며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훈련일지이며, 신명기는
레위기를 본문으로 모세가 설교한 것으로 민수기에 대한 평가와 율법의 재해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통해서는 레위기를 주신 분이 도대체 누구냐고 모세 이후의 후손들이 질문할 때,
그분이 바로의 종 된 우리 민족을 그 크신 능력과 편 팔로 홍해를 갈라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분이시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신 바로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오경은 레위기를 중심으로 봐야 잘 보이고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유기적인 관계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도 역시 레위기를 의식하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가 없다면 역사서가 바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예언서 역시 레위기를 모르면 예언서에서
그토록 진노하는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이해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레위기를 떠나서는 시가서에서
울려 퍼지는 그 아름다운 사랑과 축복에 대한 시와 찬미와 감사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역사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1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서는 단순한 일반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 즉 레위기에 기록한 하나님과의 계약을 얼마나 준행하면서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번영을 구가하였고 불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국난을 겪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고, 레위기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복도 저주도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가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5권으로 지혜문서라고도 합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과의 계약, 즉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지혜를 얻고 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시가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서 5권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시가서를 5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경을 알자 (3)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막 12: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 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단지 문자나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말씀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율법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저주와 징벌 임해”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큰 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이란 옛적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하셨던 말씀이고,
신약이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계 모든 민족과 새롭게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옛 언약을 크게 확대하면 구약성경 39권을 말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모세오경 가운데 있는
레위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중심입니다.
레위기는 오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와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의 수많은 우상숭배의 악한 풍습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당면한 과제로는 광야에서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질서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강력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런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례와
규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 음식 규례법, 산모의 산혈이 맑아지는 기간, 나병환자 감별과
처리법, 성병 감별과 처리법, 속죄일 규례, 성윤리문제, 사회윤리, 반드시 죽일 죄, 제사장 처신
규례와 성물 규례, 안식년과 희년, 토지 무르기 등을 세세하게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을 알자 (2)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첫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음부터 성경을 혼자 읽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실지라도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구스내시의 경우 성령께서 구스내시에게
직접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에서 일하고 있던 빌립을 급히 광야로 나가게 하여 성경을 풀어
주었다.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는 교사의 인도를 받으며 함께 읽는 것이 안전하다.
둘째, 성경을 지식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성경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본인은 물론
주의 몸 된 교회도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은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하는 책이다. 성경 지식이 많은 것을 믿음이 많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읽을 수도 있고, 또 그렇게라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전체를 알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씩 읽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전체를 단번에 읽을 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면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31:9~13). 모세는 오경을 한 자리에서 한 번에 읽고, 또 오고 오는 자손들에게 가르치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불러왔다. 학사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반짝 순종했으나 그 뒤 또 흐지부지 되어
하나님은 말라기에게 하나님의 너무나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 후 400년을 침묵하신다. 400년간 다시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없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실망하고 지치신 것이다. 말씀은 바르게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되 바르게 읽어야 한다. 열심히 읽는 것도 좋고
암송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님은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실 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셨다.

성경을 알자 (1)

성경에 대한 이해와 읽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통해 하나님의 마음 읽는 것이 중요”
성경을 사랑하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 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섬겨야 온전한 섬김이 된다. 곧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의미이며 성경을 잘 모르거나 희미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거나 희미하게 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겨우 1~2년 사용하고 버리는 생활용품을 사면서도 심사숙고하는데 일평생 우리 삶을 드려
섬기는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도 별다른 안타까움조차 없이 성경도 읽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는다고 한다. 읽는다손 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도 문제요 읽어도 이해를 못하니 그야말로 큰 문제이다. 더 나아가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잘못 아는 것 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을 터이나 본다고 하니 문제라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알면 되겠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바로 아는 줄 알기 때문에 문제가 더
크다.
성경을 읽어도 욕심으로 굴절된 시각으로 읽는다면 올바른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해석도 할 수가 없다. 그 좋은 예가 유대인들이 침례 요한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함으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하는도다”(행 13:27)
외운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외우면서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한두 절을 요절로 암송한다고 그 말씀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요절만 뽑아서 이기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면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이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로마 가톨릭의 문제는 바로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매우 열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그 열심은 참된 지식을 좇는 은혜
충만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말씀이 채워지지 않은 영혼의 갈급함에서 온다. 교회 안에
세미나도 많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은 많은데 성경자체를 읽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데서 오는
갈급함이다. 오래 신앙생활 했지만 성경 66권 중 딱 부러지게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이 몇 권이나
될까?

맥추절 (2)

4. 성령으로 보증받은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째 되는 이 날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2:1-4).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한 믿음을 인치신 것입니다(엡1:13). 이렇듯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은 자유와 성령의 감동이 충만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참 예배를
할 수 있게 된 날입니다(요4:23-24).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첫째 부활에 참예케 될 것을 소망하는 날입니다(살전4:13-18).
영적인 절대배가가 있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의 공로로
죄에서 자유케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성령께서 우리 믿음을 인쳐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날입니다.
5. 주님께 귀한것 드려…
우리 성도들의 생활은 감사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호흡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살전5:18).
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감사하라고 명하신 절기에는 힘을 다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라 명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라"(마8:3-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물질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에 쌓입니다(마6:19-21, 눅12:33). 또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크게 채워 주십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성도가 일평생 지속해야 할 귀중한 생활입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 예수의 은혜로 부활의 소망을 얻은 날, 성령으로 이를 인침받은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입니다.

맥추절 (1)

1. 칠칠절,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린 날은 두 번 있습니다. 먼저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계속되는 무교절의 둘째 날에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레23:4-14). 그 후 칠
주가 지난 맥추감사절에 밀의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민28:26). 무교절에
보리의 첫 이삭을 드리지만, 맥추감사절을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첫 열매를 자원하여 드리기 때문입니다(신16:9-12). 맥추감사절(출23:16)은 칠칠절,
오순절로도 불립니다. 첫 보리 이삭을 드린 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예물을 드리기에 '칠칠절'이라
하고(신16:9-10), 무교절 둘째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이란
명칭은 신구약 중간 시대부터 사용되어 신약 시대에는 널리 쓰였습니다.
2.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맥추감사절에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모여 힘을 다해 예물을
드렸습니다(신16:16-17). 밀의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린 뒤(레23:15-21), 각 사람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는 바로와 애굽의 신에게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지어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하신 하나님께 자유자로서 힘을 다해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신16:16-17).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바로
맥추감사절입니다(신26:1-11).
3. 성도가 부활할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절기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이며
예표입니다. 예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눅23장), 무교절 둘째 날인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으며(눅24:1-12), 맥추감사절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행2:1-4). 그러므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의 죽음을 면한 유월절은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를
나타냅니다(요1:29). 무교절에 누룩 없는 빵(무교병)을 먹으며,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죄 없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보여줍니다(고전15:20).
또한 맥추감사절에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드린 것은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탄생하며,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성도들이 그를 따라 첫째 부활에 참예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성령 이해 (2)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어도 결코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도 볼 수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성령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성도 안에 들어오실 때 각양 은사로써
체험을 주시기에 능히 그를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눈앞에 있으며 사람의 문명에 의하여 그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성령은 살아 있는 성도들의 심령에 들어와
성경을 한 가지로 믿게 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돕는다. 성령의
큰 체험은 성경을 믿게 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존중하고 겸손히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한
권위를 인정할 때 성령의 힘을 알게 되고, 역시 그에게서 나오는 초인적인 능력과 은사와 이적을
체험하게 된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말씀으로 온 세계를 지으셨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나타나신 인자를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하여 그를 주(主)라
시인할 수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처럼 우리 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성령을 전적으로 존중하여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우리가 믿는 진리가 확실히 증거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확신함으로 그가 말씀하는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받는다(고전 12:3).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을 받아서 그의 도움으로 예수를 아는 능력이
그리스도 교회의 능력이다.
성령에 대하여는 성경을 보는 것만큼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분량만큼 신앙도
파괴되고, 성령의 능력도 소멸된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능력으로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실존적 능력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아버지 곧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神)으로 성부, 성자, 성신 삼위 중 일위가 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의지와
아들의 의지와 함께 역시 독립적 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으로서 유일하시다(요
17:3). 하나님 아버지는 무소부재하시고 아들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니(빌 2:6-7),
이는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다(히 2:9). 아들은 마침내 부활로써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 그러나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셔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 안에만 계신 분이시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역사하시나(고전 12:11)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신다(롬 8:27-28).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요 16:13)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요 14:26).

성령 이해 (1)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다. 이성은 생(生)과 사(死)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해하기에 다른
동물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르다. 이러한 철학적 이해의 동기가 곧 종교성이다. 생(生)이라는
현실적 감각에 있어서는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어도, 사(死)에 대한 철학적인 공포증은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인간만의 두려움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증은 무한 상상력을 유발하고, 그래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 한계 그 이상을 추구하게 하는데 이것이 종교다. 영원히 죽음이 없는
신의 속성에 대한 흠모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신에 대한 무한 상상력을 통해 위로를 받으려 하는
이것이 종교 심리다.
하나님이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생기, 곧 영을 불어넣어 생령(生靈
)이 되게 하셨다. 이때부터 사람은 생령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생령이 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명하셨다. 이를 통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게 하셨고, 이로써 종교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죽음을 영원히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기독교회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의심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면,
기독교회의 신앙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영계(靈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줄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들의 문학으로 취급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을 만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성경을 초월하여 자기 신념으로써 신앙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히 기독교회의 신앙이 아니며,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다. 초보 단계부터 장성한 신앙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무식한 자들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그의 영으로 쓰신 것이라는 확신과 주장이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여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에 대한 이해를 능히 할 수 있으니
성경은 영계를 보는 창문이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다.
본래 하나님은 아무도 본 자가 없다(요 1:18). 또 볼 수도 없다(요 6:46). 그러나 유일무이하게
그에게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보았고 또 그를 안다. 그리고 그가 알고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자신을 앎으로 마침내 영생을 얻게 하는 진리를 알게 하는 이가 곧 성령이심을 이미
증거하셨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속에 들어온 인자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나의 영원한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직접 체험케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이
또한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고(요 14:17) 체험으로 알 수 있는 보혜사이시다. 보혜사(保惠
師)란 가장 가까운 의미로는 ‘돕는 이’란 뜻이다. 즉 변호자, 경호자, 봉사자란 뜻이다.

신약 교회 (3)

신약 교회의 특징은 침례, 주일성수, 성찬, 전도, 봉사, 능력에 있다.
첫째, 침례는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하였던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에게
속함으로써 과거에는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된 것이다. 이는 두 번 다시 육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체험이다.
둘째, 주일성수를 통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였으니 주일은 예수가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확신하는 자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셋째, 성찬은 떡을 떼면서 예수의 몸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의 몸은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본래
하나님과 함께 계셔 하나님이신 이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류의 죄와 상관 없으신 이가 세상에 오셨음을 믿고 시인함이요, 잔은 예수의 피를
기념함이니 죄가 없으신 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고
시인함이다. 이렇게 성찬을 매주 시행함으로써 신약 교회의 메시지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넷째, 이 진리를 받았으면 예수의 남은 고난을 교회가 짊어지고 온 세계에 전파해야 하는 것이 신약
교회의 의무다. 복음을 받은 자가 복음을 전할 의무를 행치 않으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죄가 된다(고전 11:23∼29).
다섯째, 이러한 봉사가 주 예수 강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신약 교회는 교회를 알리기 위한
다른 이벤트를 찾아 나서면 안된다. 예수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다른 모든 마을을
찾아가신 것을 신약 교회는 계속하여야 한다(막 1:35∼39).
여섯째,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은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성품이다.
능력이라는 개념을 따지자면 또 다른 이유에 휘말릴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요 14:12), “나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
18) 하신 예수의 당부의 말씀을 신약 교회는 지켜야 한다.
이렇게 교회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늘에 앉아 계시고 거기서부터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의
몸된 신약 교회임을 세상에 분명히 알려야만 한다. 이처럼 신약 교회는 부활하신 이의 생명이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생애의 연장임을 증명해야 할 사명이 있다.